1.
그날 눈사람은 텅 빈 욕조에 누워 있었다. 뜨거운 물을 틀기 전에 그는 더 살아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. 더 살아야 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 자살의 이유가 될 수는 없었으며 죽어야 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 사는 이유 또한 될 수 없었다. 죽어야 할 이유도 없었고 더 살아야 할 이유도 없었다.
아무런 이유 없이 텅 빈 욕조에 혼자 누워 있을 때 뜨거운 물과 찬물 중에서 어떤 물을 틀어야 하는 것일까. 눈사람은 그 결과는 같은 것이라고 생각했다. 뜨거운 물에는 빨리 녹고 찬물에는 좀 천천히 녹겠지만 녹아 사라진다는 점에서는 다를 게 없었다.
나는 따뜻한 물에 녹고 싶다. 오랫동안 너무 춥게만 살지 않았는가. 눈사람은 온수를 틀고 자신의 몸이 점점 녹아 물이 되는 것을 지켜보다 잠이 들었다.
욕조에서는 무럭무럭 김이 피어올랐다.
좋아하는 시 <눈사람 자살 사건>. 마음이 힘들 때 읽으면 미지근한 위로가 된다. 그래, 그저 따뜻함을 느끼고 싶을 뿐이라고.
2.
나조차도 싫어하는 내 성격들이 있다. 꽤 극단적인 감정들을 느끼는 것, 부정적인 생각으로 스스로를 끝없이 갉아먹는 것, 하고 싶은 일이 많은 것에 비해 게으른 것, 착한 아이 콤플렉스 때문에 내 실속 하나 챙기지 못하는 것 등등. 그중에서도 가장 싫은 건 불편한 일이나 감정을 그저 덮어두고 회피한다는 것이다. 모르는 척 한다고 괜찮아지는 게 아니고, 영원히 피할 수도 없다는 걸 알지만, 한없이 나약한 나에게는 그 불편함을 마주할 용기가 없다. 마주하자. 강해지자.
3.

<Suits>를 다시 보고 있다. 몇 년 전에는 하비가 좋았는데, 요즘은 루이스에게 마음이 간다. 자신도 잘 나가는 네임 파트너이면서 하비를 시기 질투하고 그 찌질한(?) 모습을 솔직하게 내보인다. 어쩌면 찌질함이라는 건 그 자체로 나를 힘들게 하는 게 아닐지도 모른다. 열등 의식에 찌들어 있는 그 모습을 남들에게는 어떻게든 숨겨보려는 쓸데없는 자존심이 우리를 더욱 괴롭게 하는 건 아닐까. 정 많고 찌질한 루이스를 보면서 일종의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요즘이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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